"어떡하지? 집 근처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한테 유난히 친한척해서 사료를 줬는데 눈 주위가 너무 더럽고 아파 보여."
간호사인 언니가 출근길에 집 앞에서 다급한 소리로 나에게 전화했다. 내가 있는 곳과는 지하철로 한 시간 거리라 당장 갈 수도 없었다. 언니는 출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잘 생각해봐. 출근 시간 내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면 그냥 출근하고, 아니면 택시 타고 동물병원에 데려가 보든지..."
마음 약한 언니한테 그냥 동물병원으로 데려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인 말을 했다. 하얀 바탕에 노란 얼룩 고양이라고 하니 바로 알 것 같았다. 건국대 옆 시장통 근처에 위치해 있어서 집 주위에는 길 고양이가 많았다. 그 중에 쭈쭈쭈~ 하고 부를 때마다 유일하게 내 앞까지 와서 사료를 받아 먹었던 노랑이가 틀림없었다.
몇 십분 후 출근이 급해서 일단 동물병원에 입원시켰다며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고 나는 저녁에 동물병원으로 가보았다. 내가 예상한 그 노랑이가 맞았다. 한쪽 귀가 잘려 있는 걸 보니, 며칠 안보인 동안 TNR 하러 잡혀간 모양이다. TNR을 당하고 몸이 약해진 사이 원래 잡혔던 곳에 방사되었다가 동네 고양이들과 싸움이 나서 한쪽 눈을 다친 것 같았다. 다른 고양이들은 한 마리도 귀가 잘려나가지 않았었는데... 유일하게 사람 앞으로 오는 노랑이만 TNR을 당한 것이다.
TNR의 취지는 좋지만, 미국처럼 하루 날 잡고 한 동네 전체 고양이를 한꺼번에 TNR 하면 좋을 텐데... 봉사자들도 많아야 하고, 정부도 수의사들도 적극 협력해야 하는 일이다.
어쨌든 수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복막염이 의심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확진이 어려운 병이지만 본인이 봤을 때 거의 확실한 것 같다며 이런 경우에는 안락사를 시킨다고 했다. 나는 원래 키우던 고양이가 범백이라는 병에서 회복했던 적이 있어 고양이 전염성 병에 대해 공부를 한터라 복막염이 얼마나 전염성 강하고 무서운 병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환경에 던져져서 놀란 와중에도, 살겠다며 눈도 안 뜬 상태로 사람들에게 무조건 잘 보이려고 자기 얼굴을 필사적으로 비비는 녀석을 안락사 시킬 수는 없었다.
언니는 마음 아프지만 원래 키우던 고양이에게 옮길 수는 없다며 집으로 데려갈 수 없다고 했다.
복막염이 강하게 의심되는 상황에서 원래 장소에 풀어주면 그 일대 고양이들 모두 복막염에 걸려 죽을 수도 있어 방사도 불가능했다. 눈 치료만 하고 원래 있던 곳에 풀어주면 되겠거니 했었는데, 안락사 얘기가 나와 정말 당황했지만 빨리 결정을 해야 했다.
"제가 키우겠습니다."
라고 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이 말이 나왔다. 언니도 수의사 선생님도 놀라서 원래 키우던 고양이는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말렸다. 심지어 수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죽을 병에 걸린 고양이 말고 병원에 다른 길고양이들 많다며 다른 고양이를 데려가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아마 오히려 나를 생각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그 순간 나는 목까지 빨개졌다. 그것은 화나서도 아니고 슬퍼서도 아니었다. 아직까지 그 감정이 뭔지 모르지만, 그때 확실히 알았다. 이 노랑이는 나에게 어린 왕자의 장미꽃이 되었다는 것을.
길가면 마주치는 많은 길고양이 중에서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나의 고양이가 된 것이었다.
몇 번 밥을 주지도 못했는데 전화상으로 듣고 바로 안 것을 보면 내 마음에 들어왔었던 모양이다.
복막염이 맞다면 수명이 한 달도 안 남았다며 다른 고양이를 키워보라던 수의사 선생님도 내가 한 달만이라도 방을 구해서 함께 살겠다고 하니 한숨을 쉬며 가버렸다.
싼 방을 구할 때까지 일단 노랑이를 입원시키기로 했다. 좁은 케이지 안에 있을 녀석을 위해 언니와 동생 모두 싼 방을 구하러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녔다. 결국 3일만에 월세 단칸방을 얻어 노랑이와 단 둘이 함께 살게 되었다. 이름도 지어 주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줄여서 레오. 다른 이유로는 장수한 예술가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픈 고양이 치고 밥을 너무 잘 먹었다. 성격도 상당히 발랄하고 힘차게 울고 배변도 좋았다. 결국 한 달만 살 거라 예상하고 들어간 방에서 겨울을 나고, 이후 넓은 집으로 옮기고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그 방에서만 아홉 달을 살았다.
한마디로 복막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하하
그 좁은 방에서 둘이 동고동락하며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레오는 천식이 있어서 먼지 때문에 고생했고 나는 레오 털 알러지 때문에 고생했지만, 지나고 나니 레오가 매일 내 팔베개를 베고 잤던 일, 아침마다 정확한 시간에 날 깨웠던 일, 눈 올 때 새벽에 마당에 한참 나란히 앉아 눈을 바라본 일 등등
추억만 아련히 남은 것을 보니 나는 서로에게 서로 뿐이던 그 시간들을 사랑한 것 같다. 따뜻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방을 생각하면 항상 소설 어린 왕자가 생각난다. 그 방은 어린 왕자의 별, 레오는 장미.
이제 레오가 나의 장미꽃이 된지 3년이 넘었다. 그 이후 길에서 입양한 엘리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지내고 있다. 레오로 인해 나는 생명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의 의미도 깨닫게 되었다. 나와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집 밖의 생명들, 길가의 풀과 벌레 모두가 그냥 내 주변에 놓여진 풍경이 아니라 잠재적인 나의 장미꽃처럼 느껴지고, 모두가 하나의 유기체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름을 붙여주니 그들과 나는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나의 의식주 모두 다른 시각으로 소비하게 되니 생활 패턴이 바뀌고, 나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이 된 내가 좋다. 꼭 길고양이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교감하면서 느끼게 되는 충만함을 알게 되면 좋겠다. 풍경을 감상하는 입장에서 그 속에 들어가 향유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 얼마나 삶을 다채롭게 하는지 모두가 알게 되면 좋겠다. 의미있는 관계들이 더 많아지길…. 살짝 귀찮은 일이 생기겠지만 더 행복하고 더 성장한 ''다른 사람''이 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송아 2013-08-07 10:27 | 삭제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의 의미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많은 분들이 사랑까진 아니어도 일단 알기라도 했으면 합니다. ㅠㅠ
최지혜 2013-08-09 10:44 | 삭제
멋진 레오와의 인연이네요!!
앞으로도 더욱더 멋진 추억쌓고 행복하세요.!
이경숙 2013-08-09 16:34 | 삭제
잔잔한 감동이...
레오도 고양이별에서 이경희님을 추억하고 있을 겁니다
엘리와도 많은 추억 나누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