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Researchers] '집을 잃은 존재들'을 사유하는 현장 연구자 솔미

  • 2026.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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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물과미래포럼 사무국

 Fuuture Researchers  | 현장 연구자 솔미


문학 속 은유로 사용되던 동물을 현실의 친족으로 호명하는 연구자가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선주민 문학의 동물 재현을 연구한 그는, 이제 텍스트 밖으로 나와 '새벽이생추어리' '살처분폐지연대'에서 실천합니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이 교차하는 울퉁불퉁한 경계선 위에서 살처분폐지연대에서 활동하는 현장 연구자 솔미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을 들어보았습니다.


2025년 기후정의행진 사전집회 때 열린 동물행진. ©현지


Q.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 영문학과에서 선주민 문학에 나타나는 동물재현을 연구해 2025년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많은 문학작품에서 동물은 상징과 은유로 등장하잖아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돼지는 부패한 지도자로,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서 고래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힘으로.. 동물은 동물 자체로 묘사되기보단, 인간 내면이나 체제의 투영물로 쓰이고 읽히는데요. 저는 <동물 자본>(Animal Capital)을 쓴 지도교수님 니콜 슈킨(Nicole Shukin)의 이론 틀을 빌려, 동물을 문학 자원으로 렌더링(2차 가공)하는데 그치지 않는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구했어요. 그때, 선주민 문학들이 좋은 참조가 돼 준 것 같아요.


Q. 선주민 문학들이요?

A. 영문학에서는 '선주민 문학들(indigenous literatures)'이란 느슨한 하위 범주가 있어요. ‘선주민 문학들’엔 꼭 '들'을 붙여야 해요. 선주-세계관에선 이런 복수성이 핵심이거든요. 캐나다란 영토 안에 자치권을 가지는 선주 국가(First Nations)가 하나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주체-객체 또한 분리될 수 있거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복수적 존재론이 세계의 근간이기 때문이에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in-divisible) 하나의 '개인(individual)'이 아닌, 얽힘 속에서 매순간 생성되고 사라지는 복합체로 모든 생명을 바라봐요. 그래서 선주민 문학에선 비인간을 인간의 대칭으로 서술하지 않고 친족 관계망에 얽힌 존재로 호명해요. '무스-형' '코요테-사촌' '라쿤-할아버지' 이렇게요! 


Q. 와! 흥미롭군요.

A. 그거 아셨나요? 무스(말코손바닥사슴), 코요테, 라쿤(미국너구리), 버팔로(아메리카들소)처럼 우리가 영어라 생각하는 단어들도 사실은 각기 다른 선주민 언어에서 왔단걸요? 그리고 미대륙을 선주민 문화에선 ‘거북이 섬’으로 불러요. 거북이 등껍질에서 천지가 창조됐단 설화가 있거든요!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세계를 빚은 주인공은 인간만이 아니에요. 수달(Muskrat)이 구해온 진흙으로, 거위, 아비새, 하늘여인이 함께 힘을 모아, 거북이 등껍질 위에 태초의 집을, 세계를 지었죠. 저는 이러한 동물과의 친족 관계망 속에서 동물-쓰기를 어떻게 '동물-하기'로 실천할 수 있는지 탐구했어요.


Q. 지도 교수님이 쓰신 <동물자본>은 자주 인용되는 책이잖아요? 저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A. 이 책은 '렌더링(재가공)'이라는 말의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붙잡아요. 동물의 사체를 기름, 아교, 젤라틴 같은 산업 원료로 끓여 가공하는 렌더링과, 동물을 이미지, 기호, 재현물로 옮기는 렌더링을 함께요. 이런 중층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가 동물의 물질적 신체와, 상징적 이미지를 함께 착취하며 굴러간다는 것을 밝혔어요. 그는 정치경제학을 끌어들여, 재현윤리로 안에서만 논해지던 문학에서의 동물연구 폭을 넓힌 선구적 연구자이셨죠.

슈킨과 저는 동물 뿐만 아니라, 소수자문학(이민자-난민-디아스포라 문학)과 SF문학에 대한 관심사까지 폭넓게 공유했어요. 덕분에 수업 끝나고 매일 오피스 아워에 찾아가 두시간씩 떠들었죠. 슈킨 덕에 ‘선주민 퓨처리즘(indigenous futurism)’이라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알게 됐는데요. 선주민 작가들이 쓴 SF소설을 말해요. 아프로퓨처리즘(르귄, 버틀러 등의)에 대한 응답이라고도 하고요. 

선주민 퓨처리즘은 기후위기 시대에 꼭 필요한 상상력을 담고 있어요. 선주민들은 자신이 ‘이미 도래한 미래’를 살고 있다고 말하거든요. 앞으로 닥칠 재앙이라 경고하는 그 일을, 이들은 이미 살아냈다는 뜻이에요. 식민주의로 황폐해진 땅을 견디고 다시 일궈 온, 세계의 끝을 한 번 통과해 본 자들이라고요. 토착성을 회복하는 건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아요. 오히려 붕괴 이후를 살아내는 법, 폐허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품어내는 법, 미래를 살아갈 지식을 쥐고 있다는 뜻이죠. 선주민 퓨처리즘이 선형적 시간관을 붙들지 않는 것도 그래서예요.


Q. 아, 정말로 선주민들이야말로 디스토피아를 살았던(혹은 사는) 사람들이군요! 생각해보지 못했던 관점이에요. 동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어요? 

A. 전 동물을 사랑해본 적은 없던 것 같아요. 오히려 무서워했죠. 그래서인지 동물을 먹진 않았어요. 부드럽고 육즙이 느껴진다고 하는 그 질감이 싫었어요. 살결이 느껴져서요. 

대신, 제겐 ‘집’을 찾는게 평생의 화두였어요. 그래서 다양한 대안공동체 문을 두드렸는데, 아르헨티나 농장에서 3개월 정도 살았던 적이 있어요. 그 때 한 돼지를 만났죠. 그곳은 생태대안적 삶을 도모하는 히피 공동체였어요. 수 만 평의 크나큰 농장에 ‘모두’가 ‘조화롭게’ 살아가는데, 비인간 동물은 돼지 딱 한 명 뿐이었어요. 전, 매일 인간이 남긴 ‘짬밥’을 돼지에게 주러가는 역할을 맡았어요. 저 넓은 들에 홀로 서있는 돼지를 볼때마다 경외감을 느꼈어요. 당신은 참 외로움에 강한 존재군요, 하는. 누군가는 동물학대라고도 할 수 있겠죠? 돼지는 사회적 동물인데, 그렇게 딱 한 명만 떼어놨으니... 하지만 제가 받은 인상은 달랐어요. 제게 그는, 어디에서든 유유히 서 있을 수 있는 큰 존재였어요. 그렇게 저와 돼지의 관계는 경외와 동경, 모종의 연대감에서 시작한 것 같아요. 제게 돼지는 불결과 탐욕의 상징이 아니었어요..



새벽 세 살을 축하하며 직접 그린 생일선물. ©솔미


Q. 새벽이 생추어리에도 관여하고 있다고요?

A. 2019년, 사람들이 공장에서 죽어가던 새끼돼지를 훔쳤단 기사를 봤어요. 그리고는 그 돼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었다고요. 돼지에게 집이 되어준 사람들이 무척 궁금했어요. 그렇게 새벽이생추어리를 찾았어요. 

새벽만이 그곳의 유일한 동물 거주민인건 아니었어요. 생추어리 경계를 배회하는 개와 고양이는 물론, 그 안엔, 철새들이 낳고 간 알, 부화한 새끼 새, 인간 ‘침입자’만 보면 무자비하게 달려들던 거위 ‘집주인’, 새벽이가 신기해하던 ‘임시거주’ 중인 당나귀도 있었어요. 난잡한 돌봄 관계망에 얽혀서, 다양한 동물들이 설왕설래하는 현실에 발을 디딘 곳이었어요. ‘생추어리(피난처)’라는 성스러운 이름과는 다르게요. 이런 혼종의 공간을 집이라 부르는게 좋았어요. 

처음엔, 그 집을 찾는 인간들이 유별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 말라는게 많았거든요. 농장이라고 하면 안되고 생추어리라 해야 하고, 동물은 거주민으로, 봉사자는 보듬이로 불러야 한다고 했어요. 그 어떠한 위계나 착취에도 반대해야한다고 강경하게 말했는데 부담스러웠어요. ‘생추어리’에 ‘보듬이’로 가서 여러 ‘거주민’을 돌봤는데요, 보듬이들의 주된 업무는 새벽에 식사를 준비하는 거였어요. 사과를 8등분 해서 씨랑 꼭지를 빼서 주라고 한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새벽이 목에 걸릴 수 있다고요. 새벽은 거의 1톤에 달하는데 사과씨 하나 못삼킬까... 이런 생각은 속으로 삼켰어요. 이들은 유별나게 진지했거든요. 두시간 넘게 대중교통을 타고 오면서, 새벽에게 주기 위한 고구마랑 감자를 삶아오던 분도 기억나요. 꼭 고구마 양 쪽에 있는 ‘꽁다리’는 잘라왔어요. 제일 맛없는 멍 든 조각은 (마지못해) 인간들에게 나눠줬고요. ‘짬밥’만 먹던 아르헨티나 돼지가 생각났어요. 무엇이 달랐을까요?

아마 이 사람들은 새벽을 사랑한단 점이 달랐겠죠? 사과 씨를 바르고, 고구마 꼭지를 떼는 수고스러움을 매일 반복하는 것보다 실천적인 사랑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아르헨티나 공동체에 있을때도 서로에게 ‘사랑’을 말하는건 익숙했는데요. 

전 새벽이생추어리에 와서야 처음으로 사랑이 추상 원칙이 아니란 걸 배웠어요. 관계 속 발생하는 의무에 비효율적이고 유별나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최선을 다해 응답하는 것이 사랑이라고요. 사랑은 곧 돌봄이라고요.

처음엔 돼지를 만나고 싶어서 갔지만, 생추어리에 다니다 보니 유별난 인간-동물들에게 더 마음이 갔어요. 뾰족한 유별남을 무뎌지지 않게 갈고 닦는 건, 엄청나게 외롭고 거추장스러운 일이잖아요? 그 외로움과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는 이 사람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스며들었어요.


Q. 살처분폐지연대에서 활동한다고요?

A. 어느새 생추어리는 저를 위한 피난처가 됐어요. 새벽이생추어리에선 내 존재를 설명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지는 기분이 들어요. 비슷한 정동이 우리를 움직이거든요. 보듬이들과 공부도 계속했어요. 해외 생추어리 사이트에 올라오는 자료를 번역하고 연구했어요. 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뭔지, 돼지 몸에 붙은 벌레는 어떻게하면 죽이지 않고 쫓을 수 있을지, 생추어리 거주민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존중받아야 하는지. 매주 머리를 꽁꽁 싸매고 토론했어요. 밖에서 봤을땐 우스꽝스럽고 비효율적인 주제들로요. 

그러다 이 공부모임을 통해 이탈리아 생추어리에 살던 돼지가 살처분됐단 소식을 접했어요. 새벽이도 그런 위험에 처할 수 있잖아요. 새벽이생추어리 운영진들이 살처분에 반대하는 액션을 꾸렸어요. 돌이켜보니, 이 액션도 ‘재현’이었네요? 살처분 재현. 대신 끌려가서 매장 당하는 대상은 돼지가 아닌, 사람이었어요. 서울역에서 크게 사이렌을 울린 뒤, 사람들을 끌고 가 흙에 묻는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나니 마음이 동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였어요. 이 사람들을 축으로 살처분폐지연대가 조직됐어요. 

저는 현재 살처분폐지연대에서 두 가지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하나는 살처분 관계자 인터뷰집을 제작하는 일이에요. 살처분이라는 국가명령이 실제로 어떤 구체적인 몸과 노동을 통과하며 작동하는지를 묻는 작업이에요. 두 번째는 살처분의 대안으로서 백신의 효용성을 검토해보는 연구모임을 운영해요. HPAI(고병원성 조류독감) 백신에 반대하는 핵심 논거인 (1)무증상 전파 (2) 무역장벽 (3)변이 및 인체감염 위험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지 전문가들에게 발제를 들은 후, 연구모임원들끼리의 토론을 기반으로 연구보고서를 작성해 출판할 예정이에요.


Q. 다른 작업은요?

A. 지금은 알렉스 블랑쉐(Alex Blanchette)의 <포코폴리스>(Porkopolis) 번역에 가장 힘을 쏟고 있어요. 한 연구자가, 미국의 양돈 기업에서 2년간 일하며 써내려간 노동 에세이(민족지학)예요. 이 책은 조금 더 ‘솔직한’ 싸움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공장식 축산을 단죄하고 동물을 구원하자는 선형적인 영웅 서사가 아니에요. 얽힘과 호혜의 언어로 인간-비인간 사이의 위계를 수평적으로 닦아내는 포스트휴머니즘의 매끈함과도 결을 달리해요. 이 책은, 울퉁불퉁해요. 동물–인간–자본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전도되는 관계의 긴장을 끝까지 붙들거든요. 우리 사이의 갈등을 조금 더 솔직하고, 따라서 더 불편한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줘요. 내년 6월 출판이 목표예요! 많관부 !!!


Q. 동물과미래포럼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A. ‘동물과미래포럼 연구 소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요. 소모임이 있는 매달 말이 기다려져요. 재밌거든요! 저는 이제 하나마나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어요. ‘차별은 차별이다’, ‘폭력은 폭력이다’ 같은 순환논리에 갇힌 선언 말이죠... 그런데 동물(권)에 관심없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항상 이 전제부터 설명해야 해요. 피로하죠. 연구모임에선 달라요. 공유된 전제 위에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기분이 들어요.

또 이 모임을 통해 시도해보고 싶은 것도 있어요. 퀸즈대학교에서, <동물 전회(Animal Turn)>란 팟캐스트를 박사생이 6년째 운영하고 있어요. 여러 대학원생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는데요. 정말 광범위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구나, 하고 놀라요. 연구소모임을 통해서도 국내 보석같은 동물연구자들을 만나고 연결될 수 있어 기뻐요. 이 분들의 빛나는 졸업논문을 팟캐스트로 소개하고 싶어요. 이렇게 멋진 분들 모아주신 동물자유연대에 감사합니다!



석사 시절, 동물 재현에 관해 연구한 캐나다 빅토리아의 흔한 앞바다 풍경. ©솔미


Q. 앞으로의 연구는 어떤 모습을 띨까요?

A. 제 평생의 화두는 집을 찾는 것이었어요. 집을 잃은 존재들에 마음이 가요. 앞으로는 다종 실향의 역사를 추적해보고 싶어요. 

인간이 ‘너의 집’이라고 규정해 놓은 지리산을 벗어나던 반달가슴곰 KM-53, 오삼 기억나시죠? 오삼이라는 한 개인과 그 종이 겪어 온 실향과 이주의 역사를 따라가며, 토착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 같아요. ‘토착성’을 기원이나 민족성으로 환원하지 않고, 이 손상된 땅(토)에 들러붙어(착) 살아가는 능력으로 재사유 하는 것이요. 이 땅에서 밀려나고도 스스로 땅과의 관계를 새롭게 쌓아 온 오삼에게, 토착할 능력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오삼은 토착민이기도 하지만 디아스포라이기도 해요. 식민-개발주의로 집을 잃은, 실향민. 은유일 수 있겠죠. 그런데 이제는 인간의 동물 은유가 옳으냐 그르냐, 종차별적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자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 싶어요. 거꾸로 묻고 싶어요. 인간이 쌓아 올린 촘촘한 경계들이, 사실은 전부 은유에 불과한 건 아닌지를요. 동물들을 통해 이런 질문에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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