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하기

사진으로 다시 보는 6월 항쟁


10일은 6월 항쟁 17주년. 6월항쟁이란 87년 6월 한달 동안 전국적으로 일어 났던 전두환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이런 범국민적인 저항운동의 기폭제는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진 1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 사진이 바로 그날 그의 모습이다. 다음날 재야와 통일민주당이 연대해 결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면서 그해 6월은 뜨겁게 흘러 갔다.

20여일간 전국적으로 500여만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하였다. 6월 29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는 마침내 국민 앞에 항복 선언을 한다.

한편 유시춘 전 국가인원위원회 상임위원은 9일 6월항쟁 관련 인사들과 노무현 대통령을 방문한 자리에서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6.10항쟁 또 이어지는 7,8,9 노동자투쟁의 의의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6월 10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할 필요가 있다\"며 6.10을 5.18과 같은 국가 기념일로 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은 6월민주항쟁 국가기념일을 제정하기 위한 대국민 홍보 활동 등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밝힌 것으로 CBS가 보도했다.

도깨비 뉴스는 6월항쟁 17주년을 맞아 자료사진을 통해 87년 6월의 모습을 다시 본다. BGM은 안치환 작사 작곡의 \'마른잎 다시 살아나\'.  대학생 시절의 안치환이 부르는 노래다.


87년 6월9일 시위 도중 머리에 최루탄 파편을 맞아 사망한 고 이한열씨.


고 이한열씨가 87년 6월9일 시위 도중 머리에 최루탄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순간. 이 사진이 6월 항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만큼 6월 항쟁을 관련자료에 가장많이 등장하는 사진이다. 서울에 주재했던 외신기자가 찍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루탄속 `6.10시위`
연세대와 고려대에서 집회를 끝낸 대학생들이 10일 오후 서울서대문구 홍제동에서 차도에 누운 채 시위를 벌이던 중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흩어지고 있다.


명동시위 이틀째
6.10대회 가두시위뒤 명동성당에서 철야시위를 벌인 대학생들이 11일 오전11시반 성당입구에 벤치 문짝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고 있다. 이날까지 이른바 넥타이 부대들은 관망하고 있었다.


경찰-시위대 충돌
서울 미도파백화점 사잇길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자 방독면과 헬멧등으로 무장한 사진기자들이 취재를 하고 있다.


<6월항쟁> 불타는 바리케이드
서울중구 회현동 대로변의 가게에서 학생들이 탁자와 의자등을 들고나와 바리케이드를 친뒤 불태우고 있다.


명동의 대치
명동성당에서 10일밤 철야시위를 벌인 대학생들이 11일 이틀째 시위를 계속, 성당앞 도로를 점령해 벤치 문짝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날 오후에도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명동성당에서 철야시위와 농성을 벌인 대학생들이 11일 오후 6시 성당입구 오르막길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등 구호를 외치며 이틀째 시위를 벌이고 있다.


<6월항쟁> (1987.06.12)


<6월항쟁>  (1987.06.12)


사흘째 서울 도심 시위
12일 오후5시반경 을지로2가에서 고려대생 5백여명이 도로를 점령한채 가두시위를 벌여 교통이 한때 막혔다.


명동성당시위 나흘
명동성당에서 나흘째 농성시위를 계속중인 학생 시민등 3백50여명은 13일 오후 성당입구에서 스크럼을 짜고 `현정권 퇴진`등을 요구했다.


대로의 연좌시위
대학별 `출정식`을 가진뒤 서울도심에 진출한 대학생중 일부는 13일 오후 5시반경 을지로 입구로터리의 차도에 연좌, 호헌철폐` `구속자석방`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대치경찰 철수
성당주변에 경계를 펴고 있던 경찰이 농성시위학생들에 대한 안전귀가를 보장하기 위해 14일밤 10반경 철수하고 있다.


도심의 시위군중
18일 오후 7시반경 한국은행앞 길 옆에 세워둔 진압경찰 수송버스를 학생들이 도로 한 가운데로 몰고 나와 돌을 던지며 공격했다.


21세기는 시민운동의 시대. 이 시민운동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그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때, 시민운동은 우리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87년 6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주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시민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이한열. 쓰러진 이한열의 모습은 이후 6월항쟁 기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한참이 지나서야 공개됐다. (2003.6.10 서울=연합뉴스)  아마 당시 이 모습이 공개됐더라면 청와대가 불탔을 지도 모른다. 당시 항간에는 이한열은 사실상 이미 죽었으나 이한열의 죽음은 정권퇴진을 의미하기 때문에 권력의 힘으로 사망발표가 강제로 미뤄졌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연세대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고 이한열(李韓烈)씨.


<6월항쟁> 연세대(1987.06.19)


`386의 가치` 여전히 유효합니까?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이한열씨의 영결식.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자주 민주 통일 등 공적 가치를 중시하게 된 386세대는 현재 변화 주도 세력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들의 경험과 사상이 이제 역사의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서럽다 뉘 말하는가 흐르는 강물을
꿈이라 뉘 말하는가 되살아오는 세월을
가슴에 맺힌 한들이 일어나 하늘을 보네
빛나는 그 눈속에 순결한 눈물 흐르네
가네 가네 서러운 넋들이 가네
가네 가네 한 많은 세월이 가네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푸르른 하늘을 보네
마른잎 다시 살아나 이 강산은 푸르러


도깨비뉴스 리포터 물은셀프 selfwater@dkbnews.com
입양하기
인스타그램안내



댓글

김효정 2004.06.14

사진을 다시보니 넥타이 부대...ㅠ.ㅠ 생각나네요. 광장에 거의 전교생 다 모여 시위하고 인근 상권 상인분들 함께 동참하시고... 감동...ㅠ,ㅠ 그 땐 어쩔수 없이 적이었던 전경들... 많이 불쌍해 보였어요.


김효정 2004.06.14

시대마다 다른 모양으로 \'참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되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시절 학교 댕긴 사람으로서 피할 수 없는 성향인 것 같기도 해요... 가끔은. 누군가가 아닌 \'나\'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서 역사를 바꾸고 세상을 좀 더 바르게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은 고사리 손으로 대항했잖아요... 공룡에... 동물복지도 나중엔 옛날 얘기 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겪는 시기가 오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모두 노력한다면요.,..


김효진 2004.06.14

맞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듯이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는 거지요. \'저들\'이 그냥 내주는 것은 없습니다. 역사는 민초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투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6월 항쟁이 가능했던 것도 80년 광주의 피흘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젊은이들은 그것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광주 민주화 투쟁을 보고 각성하여 다른 세대와는 차별이 되는, 생명력있는 의식과 문화를 키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박성미 2004.06.14

정말 슬픕니다... 저때 정말 청춘을 불사르며 목이 터져라 시위에 참석하였습니다. 불타는 마음.. 솟구치는 분노... 결국은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민주화를 이룩했지요.. 그러나.. 지금 또 한편으로 되돌이켜 생각하면 우리는 저 젊은이의 죽음을 잘 계승하고 있나 반문하게 됩니다...ㅜㅜ


이경숙 2004.06.14

대표님....멋쟁이!!!!!!! 우리도 광화문에서 집회 한번 합시다........ 고 이한열군의 명복을 다시한번 빌며.......... 살맛나는 세상은 멀기도 멉니다........ 끝도 보이지 않네요.................................ㅠ.ㅠ


조희경 2004.06.14

아래 이현숙님이 올린 글을 보고 도깨비신문에 갔다가 이 기사를 보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저 시간에 설계사무실에 앉아서 전문직여성으로서의 제 성공에만 급급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공개수배령으로 좇겨 다니던 선배언니 영향 좀 받았엇지만요.) 누군가는 저렇게 피를 흘리고 눈물로 절규하며 가슴을 터트리며 이 민주화를 위해 투쟁을 했고 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사렀지요. 그 바탕위에 우리가 지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슴이 메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 독재의 시절을 반추하는가운데 지금에 와서는 유행처럼 번져가는 획일화된 사고 방식의 잣대로 현실에 임하고 싶지 않습니다. 길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논점이 아니므로 더이상은 말 안하겠습니다. ( 최근 몇년동안의 대북관계를 보며 625에 참전하여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고 살아온 80대 아버지의 분노를 결코 시대적 논리로 희석하시라 할 수없고 지금의 2~40대 젊은 층의 민주화, 노동운동 그 모든 것을 따로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두가 상생, 화합이 필요한 일이기에) 여하튼! 말하고자 하는 논점이 너무 멀리 비껴갔는데 6월의 여러가지 역사적 사건은 결코 잊어서 안되는 것이고, 이 사진을 다시금 보는 가운데 동물운동을 한다하는 내 자신이 또 다시금 가슴에서 움틀대는 것은, 우리는 너무 날로 거저 먹으려 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몸을 많이 써야 겠습니다, 아끼지 말고. 허구헌날 교통방송에서 나오는 집회 소식을 들으며 오늘 어디서 몇천명이 모였고 어디는 만몇천명이 모인다는 둥.. 그런 뉴스 들으며 아직도 먼길을 가야만 하고, 때를 묻는 이들에게 과연 \'때\'가 무엇인지 진정 몰라서 묻는 것인지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듭니다.(더 하고 싶은 뒷말은 생략.)


후원 입양